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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문화
역사와 전통, 그리고 현대가 만나는 의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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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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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정부라는 지명은 언제부터 어떻게 유래된 것 일까 조선 제3대 태종이 방번(芳蕃)과 방석(芳碩)을 살해하고 소란을 일으키자 태조는 불충불의(不忠不義)한 자와 함께 살 수 없다고 하여 함흥(成興)으로 옮겼다. 이후 태종은 여러차례 사자(使者)를 보내어 용서를 빌었으나 태조는 사자를 감금, 살해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함흥(威興)의 사(使)' 또는 함흥차사 라는 말이 이때부터 생겨났다. 그러나 그후 태조는 화가 누그러지는 듯하면서 태종 2년(1402) 12월에 지금의 의정부까지 돌아오게 되었다.
    태종은 부왕을 맞으려고 천막을 치고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태조는 활의 명수이기 때문에 중신 하륜(河崙)은 부왕 태조가 반드시 태종을 해칠 것이라고 예상하고 천막에 큰 기둥을 많이 세웠다. 그 결과 태종은 순간적으로 기둥 뒤에 몸을 피하였기 때문에 다행히도 부왕의 화살을 맞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곧 잔치가 시작되자 태종은 '헌수(獻壽)'의 뜻으로 친히 부왕 태조에게 잔을 올려야만 하나, 이 또한 하륜의 지략으로 하륜 자신이 잔을 올렸다고 한다. 이리하여 태조는 결국 한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금의 의정부지방에 장기간 머물렀다고 한다. 의정부 3정승을 포함한 각 대신(大臣)들은 한양보다도 지금의 의정부로 와서 정무(政務)를 의논하고 결재를 태조에게 받았기 때문에 의정부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
    이상의 내용은 비록 후대의 기록에서 확인된 것이지만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엄연한 역사의 사실로 조선 초기 이래 전승되어 오던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일제가 의정부지방에 철도를 부설할 때의 기록 사항에서도 일제시대 이전 조선시대부터 '의정부' 라는 지명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일제는 경원선 철도부설을 위해 한국 강점 초기부터 부지의 측량과 철도 건설계획을 치밀하게 작성하였다. 경원선은 용산역을 기점(起點)으로 하여 청량리, 의정부, 동두천, 연천 등으로 뻗어 나가는 15개의 공구(工區)로 나누어 추진되었다. 용산에서 청량리까지는 1910년 10월 15일에 기공(起工)하여 1911년 8월 6일에 준공되었고, 청량리에서 의정부 구간은 제2공구로서 제1공구와 마찬가지로 1910년 10월 15일에 착공되었다. 그러나 준공은 1911년 7월 15일에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이미 당시에 의정부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다. 일제 당국은 경원선 철도 부설을 위한 도면작성과 측량계획을 이미 1904년에 완성하였는데, 이때에 지금까지 사용되어 오던 의정부라는 지명을 그대로 이용하여 측량 및 설계도면을 작성한 것이다. 어느 지방의 지명이든 그것은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사학자들이 사료(史料)의 빈곤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그 지방의 지명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 행정구획을 재조정한다거나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때에 상당한 역사성을 고려하면서 지명을 확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이다. 의정부라는 지명은 오랜 전통을 지니면서 내려온 것이 틀림없다. 「京元線建設工區略圖」를 참고할 때 확신은 더욱 뚜렷하여 진다 . 의정부라는 지명은 조선 초기부터 사용되어 내려온 것이며, 1912년 5월 23일자로 공포된 지방행정구역 조정시에 의정부리라고 한 것도 물론 기존의 이름을 그대로 활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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